문화행동이 흔한 시대가 되었다. 거리에서, 집회장에서, 농성장에서, 읽고, 쓰고, 연주하고, 전시하는 일은 이제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문학, 미술, 사진, 연극, 영상, 음악, 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장르의 언어와 예술가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예술적 행동방식이 기존의 사회적 행동방식을 대체해가고 있다. 사회적 의제에 대한 예술적 형상화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여러 장르에서 의미 있는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는데 지난 해 ‘두개의 문’이 가장 큰 화제를 모았다면 올해에는 ‘지슬’이 그 뒤를 잇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만으로 진보적 문화예술운동이 잘 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현재의 진보적 문화예술운동이 비조직적으로 펼쳐지고, 명확한 목표 없이 사회적 변화와 개별 아티스트들의 노력, 일부 활동가들의 힘으로만 진행된다는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연 행동과 발언, 작품의 완성도로서 얼마나 의미 있는 성취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돌아보자는 이야기이다.
물론 문화행동의 가치는 예술적 완성도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동의 정신과 발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현장과의 빠르고 지속적인 결합 역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문화행동을 완성도라는 잣대만으로 평가하려 드는 것은 지나치게 한정된 평가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예술로서 가치와 파급력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발언하고 행동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감과 감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호소력과 완성도를 갖추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그 호소력과 완성도는 단지 예술 작품의 내적 완성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실제로 현재 문화행동에 참여하거나 작품으로 예술적 발언을 하고 있는 이들의 행동과 작품이 모두 나름의 역할과 가치가 있는데 반해 그 행동과 작품에 대한 평가는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보편화된 문화행동과 예술적 발언의 양만으로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사회적 발언에 참여하는 음악인들 가운데 바로 그 사회적 문제를 예술작품으로 표현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두루뭉술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결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반드시 그 문제를 예술로 발언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가 작품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사회적 의제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의제를 작품으로 형상화하지 않는 행동의 간극이 하나의 현상이라면 이제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다. 직접적인 언급을 꺼리는 경향이 과거 진보적 문화예술운동의 기계적 표현에 대한 거부인지, 아직 창작으로 표현되기에는 시간이 짧아 충분히 내면화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음악으로 추구하는 스타일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이러한 현상이 과도기적 현상인지 말이다.
또한 행동이나 작품이 존재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참여하고 발언했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실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함으로써 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 표현의 방식은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결코 획일적으로 규정할 수 없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며, 수용자의 해석을 통한 정치적 의미 부여 역시 중요한 것이지만 행동과 결합되었을 때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례들만 지나치게 많다면 행동 여부가 예술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릴 것이다. 사견이지만 일례로 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했던 제 1회 레드 어워드의 수상자 중에서 회기동 단편선의 경우는 예술적 완성도와 활동에도 불구하고 좌파적 예술언어를 직조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경우였고 김수박의 <사람 냄새>의 경우에도 금기시되었던 소재를 다뤘다는 것 이상의 완성도를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남영동 1985>의 경우도 소재에 비해 극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사회적 행동에 자주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드물고, 금기시되었던 소재가 작품으로 형상화될 때는 낮은 완성도에 비해 일방적인 찬사만이 쏟아지는 분위기가 있다. 이렇게 행동으로서의 가치와 예술로서의 가치가 등치되어서는 곤란하다. 예술은 행동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게 ‘진보적 예술인’이 되는 이러한 분위기는 어쩌면 1980년대와는 다르지만 유사한 편향을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묻고 싶다. 이 문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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